<종묘 정전>
▲위 치 : 서울 종로구 종로 155
▲운영시간 : 평일 오전 9시∼오후 5시 (공휴일 9시~오후 6시)
※ 매주 화요일 휴관
▲입장료 : 대인 1000원 소인(7~18세) 500원(종묘 관람권으로 창경궁 관람가능)
▲전화 : (02)765-0195/http://jm.cha.go.kr//
▲개요 :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神位)를 모신 신궁이다. 태조 3년(1394) 10월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그해 12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9월에 완공하였다. 현재 정전에는 19실에 49위, 영녕전에는 16실에 34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은 국보 제227호, 영녕전은 보물 821호로 지정되어 있고 1995년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종묘 안내도>
궁궐기행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이다. 입구에는 세 칸짜리 문이 있는데 이것이 종묘의 정문으로 외대문이라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창엽문이라고 했다는데 창엽이라는 말은 조선 왕조가 번창하기를 바라는 뜻을 담고 있다. 외대문의 현판은 정도전이 썼다고 하나 지금은 그 현판이 전해지지 않는다.
외대문은 다른 궁궐의 정문과는 달리 매우 간결해 보이는데 이는 경건한 장소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함일 것이다. 외대문 앞에는 하마비가 있다. 하마비란 ‘모두 말에서 내려 존경의 예를 갖춘다’는 뜻을 가진 푯돌이다. 그래서 이곳에서부터는 말에서 내려야 했다.
외대문 안으로 들어가니 종묘안내도가 나온다. 그 맞은편에는 세계문화유산 푯돌도 보인다. 1995년 12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그것은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또는 아주 오래된 유산’으로 평가되었을 때다. 종묘는 세계적으로 소중하게 보존되어야 할 가치를 가졌다는 뜻이 된다.
이곳 안내도 앞에서는 문화유산해설사가 적정한 인원을 모아 인솔하는 출발지다. 아무래도 자세하게 설명을 들으면서 종묘를 이해하는 것도 괜찮을 듯한데 시간이 없어 독자적으로 다닌다.
<종묘 안내도>
정전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세 줄의 길이 보인다. 이를 삼도라고 하는데 삼도의 가운데 길은 돌아가신 왕과 왕비의 영혼이 다니는 길로 신도라 하고 오른쪽은 왕이 다니는 어도, 왼쪽은 세자가 다니는 세자도라고 한다.
<삼도>
종묘가 지닌 중요한 의미는 돌아가신 왕을 위한 제사를 지내는 장소라는 것이다. 제사의 ‘제’는 하늘에 대한 의식을 말함이고 ‘사’는 땅에 대한 의식을 말한다. 그러므로 제는 신과 사람이 만나는 것이고 사는 조상과 후손이 만나는 것이니 제사는 사람과 신이 결합하는 종교적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예기’에는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자의 도는 예보다 더 급한 것이 없고 예에는 제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제사는 왕이 나랏일을 바로 펼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의무인 셈이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도읍지를 정하면서 궁궐의 왼쪽에 종묘를 세우고 오른쪽에 사직을 지었다. 종묘는 왕의 조상을 위한 사당이고 사직은 땅과 곡물의 신을 모신 제단이다.
향대청으로 향한다. 향대청은 제사의 예물을 보관하기 위한 곳인데 그 앞에 팔작지붕을 한 망묘루가 있다. ‘망묘루’는 사당을 바라보는 누각이라는 뜻인데 종묘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 왕이 잠시 머무르며 마음을 가다듬는 곳이다.
<망묘루>
망묘루 옆 안쪽에는 공민왕 신당이 있다. 공민왕은 고려의 31대 왕으로 원나라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하여 노력했던 왕이다.
조선의 사당에 고려왕의 신당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종묘를 세울 때 북쪽에서 회오리바람이 불어오더니 공민왕의 영정이 마당에 떨어졌다. 왕과 신하가 기이하게 여겨 의논한 끝에 그 영정을 봉안하기 위하여 신당을 지었다고 한다.
공민왕 신당 옆에 있는 향대청은 조상을 모시기 위해 사르는 향, 제사의 뜻을 알리는 축문, 신에게 올리는 예물을 보관하는 장소이다. 제사를 지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향이다. 우리 조상들은 사람이 죽으면 혼백이 흩어진다고 믿었는데 이 때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내려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사를 지낼 때는 조상의 혼백을 모셔 와야 하는데 이 때 하늘로 올라간 혼을 부르기 위해 향을 피운다.
<향대청>
오늘날은 향대청에서 전시실을 꾸며 국가의 제사에 대한 이야기와 종묘에 대한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종묘의 역사는 삼국사기에도 나올 정도로 꽤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도 종묘라고 할 수 있는 시조묘를 세웠다는 기록이 나온다. 특히 조선의 종묘와 영녕전에 관한 의례와 절차를 기록해 놓은 ‘종묘의궤’를 보면 종묘에 관련된 내용이 자세하게 실려 있음도 보게 된다.
어숙실로 향한다. 어숙실은 정전의 동쪽에 있는데 왕이 제례를 올리기 하루 전에 목욕으로 몸과 마음을 단정하게 하며 제사를 준비하는 곳이다. 지금의 어숙실은 태조 4년에 정전과 함께 지어졌으나 임진왜란 중에 불에 타 없어진 것을 광해군 때 다시 지었다.
제사는 새벽 1시경에 지내기 시작하므로 왕은 이곳에서 면복을 입고 제사가 시작되기 전에 정전으로 향하게 된다.
<어숙실>
어숙실을 나오면 바로 정전의 동쪽 문앞이다. 왕과 세자는 이 문을 통해서 정전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동문 앞에는 두 개의 건물과 한 개의 우물이 있다. 건물은 음식을 준비하던 전사청이고 그 옆의 수복방은 종묘를 지키고 제사를 돕는 사람들이 머물던 곳이다. 우물은 제사에 필요한 물을 긷는 곳이다.
정전으로 들어가는 동문 앞에는 두 개의 판이 있다. 길 위에 있는 판위는 왕의 것이고 오른쪽 길 아래의 것은 세자의 판위다. 어숙실에서 나온 왕과 세자는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제례를 위해 마음을 가다듬으며 준비를 하는 것이다.
<정전의 동문>
<종묘의 정전>
정전은 종묘의 가장 핵심적인 건물이다. 높은 기단 위에 세워진 정전은 정면 19칸, 양 옆으로 3칸의 크기인데 신주를 모시는 신실은 한 칸 규모로 나뉘어 있다. 원래 태조의 고조(목조), 증조(익조), 할아버지(도조), 아버지(환조) 등 4대 조상과 태조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지은 건물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승하한 왕이 늘어나자 신주를 모실 수 있는 공간이 없으므로 세종 1년(1419)에 별도의 건물을 지었다. 새로 지은 건물을 영녕전이라고 부르고 태조의 4대 조상의 신주를 그곳에 옮겨 놓았다.
그러다 세월이 가면서 정전을 증축하게 되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불에 타 버린 것을 광해군 때 다시 짓고 그 이후에 영조 때 4칸, 헌종 때 4칸이 추가되어 지금의 19칸 규모가 되었다. 정전의 정문 동쪽에는 공신당이 있는데 국가에 공을 세운 사람들을 모신 곳이며 왼쪽에는 칠사당이 있다. 칠사당은 일곱 신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정전을 보고 있노라면 웅장한 모습이 위압감을 준다. 굵고 둥근 기둥과 맞배지붕으로 지은 지붕의 용마루 양쪽에는 이상하게 생긴 새의 머리모양을 한 취두가 있고 처마 마루에는 잡상이 있어서 이들이 정전을 지켜주는 수호신 역할을 한다.
<정전 정문의 동쪽에 있는 공신당>
<정전 정문의 서쪽에 있는 칠사당>
종묘에는 조선 왕의 신주가 모셔져 있는데 정전에는 19위, 영녕전에는 16위로 모두 35위이다. 조선의 왕은 모두 27명인데 어떻게 된 일일까?
왕 중에는 살아 있을 때 재위를 했던 왕도 있지만 죽어서 왕위에 오른 왕도 있다. 이를 추존이라고 하는데 추존된 왕은 모두 9명이다. 조선의 27명의 왕과 추존된 9명의 왕, 그리고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황태자 부부를 합쳐 37위인데 종묘의 신주는 35위이다. 2명은 어디로 갔을까. 바로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이다.
종묘에는 왕의 신주가 35위, 왕비의 신주는 48위로 모두 83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의 정문>
정전의 남쪽에는 악공청이 있다. 종묘제례에는 팔일무라는 춤과 함께 음악을 연주하는데 춤추는 사람이 64명,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 108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이 잠시 머무르거나 휴식하는 장소가 악공청이다.
<악공청>
영녕전으로 간다. 정종이 승하하면서 세종은 정전 서쪽에 별도의 건물을 세우고 영녕전이라고 했다. 조상과 자손이 영원히 평안하라는 뜻이다. 영녕전이 처음 세워졌을 때는 태실 4칸에 양쪽에 협실 각각 1칸씩으로 되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것을 선조가 다시 세웠다. 현종 때부터는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는데 양쪽 끝에 하나씩 늘어나는 바람에 모두 16칸 건물이 되었다.
<영녕전>
왕의 이름은 어떻게 지었을까? 왕의 사후 이름을 묘호라고 하는데 업적이 뛰어난 왕이 승하하면 세 가지의 이름을 붙였다. 왕의 업적을 찬양하는 존호, 그의 일생을 평가하고 공덕을 기리는 시호, 왕의 삼년상이 끝나고 신주가 종묘에 들어갈 때 그 신주를 부르는 묘호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세종의 존호는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시호는 장헌(莊憲), 묘호는 세종(世宗)이었다.
묘호를 정할 때 ‘조’와 ‘종’의 두 가지가 있는데 이것은 어떻게 다를까? 중국의 ‘예기’에는 “공이 있는 자는 ‘조’가 되고 덕이 있는 자는 ‘종’이 된다”고 했다. 그러나 조선의 경우 대체적으로 건국 시조나 일시 중단된 역사를 다시 되살린 왕에게는 ‘조’가 붙여졌고 왕위를 정통으로 계승한 왕에게는 ‘종’이 붙여졌다.
즉 조선 건국의 공이 큰 태조,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인조, 임진왜란을 치른 선조의 묘호는 조이고 덕으로 나라를 다스린 세종의 묘호는 종인 것은 이 원칙을 따른 것이겠으나 조선 시대 ‘조’가 붙은 묘호가 많은 것은 ‘조’가 나라를 세우고 나라를 중흥시킨 공적이 큰 왕에게 붙여졌던 관례를 통해 은연중에 위대한 왕으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영녕전을 나와 뒤편의 숲길로 들어선다. 키 큰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모습은 도시 속의 공원으로써 손색이 없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처음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가득했다고 한다. 종묘의 소나무가 화재로 불에 탄 뒤 갈참나무와 잣나무, 때죽나무, 팥배나무 등이 숲을 이루며 종묘를 호위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는 꽃나무는 드물다고 한다. 궁궐의 후원과는 달리 돌아가신 분들을 위하여 만든 공간이기 때문이다.
<숲길>
숲길을 걷다 보니 창경궁으로 향하는 출입구가 나온다. 원래는 하나로 연결되었던 것을 일제가 맥을 끊는다고 종묘와 창경궁 사이에 도로를 만들었다.
<창경궁으로 이어지는 출입구에서>
다시 종묘의 정문으로 나간다. 종묘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종묘가 예술적 특징을 갖춘 수준 높은 건물로 평가되었기 때문일 텐데 세계의 건축가들을 깜짝 놀라게 만든 것은 독창적인 건축 방법이라고 한다.
보통은 건물의 공간이 좁다고 생각되면 그 옆에 그와 비슷한 새 건물을 따로 지어 공간 문제를 해결하지만 정전과 영녕전은 기존의 건물 옆에 칸수를 늘려 붙이는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세계 어떤 건물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또 하나, 옛 왕조의 왕과 왕비를 위한 제례를 올리는 사례는 오늘날의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더구나 83명에 이르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사당에 모셔 놓고 600년 가까이 제례를 치르는 전통을 가진 나라는 오직 우리나라밖에 없다는 것이다.
종묘의 정문으로 다시 돌아나가니 아까 들어갈 때는 보지 못했던 연못이 하나 있다. 중지당이라고 한다는데 연못의 모양을 자세히 살펴보니 가장자리는 네모지고 안쪽에는 동그란 모양의 섬이 하나 있다. 이를 우리 조상들은 ‘천원지방’이라고 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연못을 만들 때 주로 이런 모습으로 꾸며왔다.
<중지당>
중지당 옆에는 종묘제례에 대한 안내문이 서 있다. 종묘에서 왕이 드리는 제사는 나라의 큰 행사였으므로 이를 종묘제례라고 하는데 왕이 직접 지내는 종묘제례는 봄, 여름, 가을, 겨울과 12월에 한 번씩으로 일 년에 모두 다섯 번이었다.
<종묘제례 패널>
종묘제례는 나라의 최고 행사이므로 엄격한 법도에 따라 진행되었는데 1908년 국가행사로는 폐지되었다가 광복 후 1969년 다시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 의해 제향되기에 이르러 1975년부터는 전통문화유산으로 되살아났다. 이 종묘제례는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어 지금도 해마다 5월 첫째 일요일이면 종묘에서 제례를 지낸다.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 밖으로 나간다. 이곳은 또 하나의 장관이 펼쳐진다. 더위를 피하여 노인들이 넓은 뜰에서 바둑과 장기를 두고 있는 것이다.
<종묘공원은 하나의 거대한 기원이다.>
종묘공원의 한 쪽에는 우물이 하나 있다. 왕이 종묘에 오고 가며 이 어정의 물을 길어 마셨다고 한다.
<어정>
종묘는 보기에는 단순하지만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궁궐의 한 모습이다. 조상을 공경하는 마음이 종묘제례로 남아 있고 이것이 국가적인 제사로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으니 우리 민족만의 고유한 전통문화를 엿보는 계기가 되었다.<2008.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