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의 역사 _ 사적 제 123호
창경궁의 처음 이름은 수강궁이였다. 1418년 세종대왕이 왕위에 오르자 생존한 상왕인 태종을 편안히 모시기 위하여 수강궁을 지었다.
그후 세조의 비 정희왕후, 덕종의 비 소혜왕후, 예종의 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하여 성종 15년(1484)에 명정전, 문정전, 통명전 등 궁궐을 크게 짓고 창경궁이라 이름을 고쳤다. 이궁은 선조 25(1592)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타버렸던 것을 고아해군 8년(1616)에 다시 복구하였다.
순조 30(1830)에 또 큰 화재가 나서 많은 궁궐건물이 불타버렸던 것을 순조 34(1834)에 대부분 다시 지었으나 정전인 명전전은 광해군 8년(1616)에 중건된 이래 원형대로 보존되어 조선 왕궁의 정전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국보 제 2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순종 3년(1909)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개설하고 일반인에게 관람하게 하였다. 1911년에는 일제가 궁내에 박물관을 설치하면서 동,식물원을 포함하여 창경원이라 이름을 고쳐 그격을 떨어 뜨렸다.
1983년 12월 부터 1986년 8월까지 3년간에 걸쳐 일제가 파괴, 변형시킨 창경궁을 궁궐 본래의 모습으로 복구하는 중창공사가 진행되었다.
이에 창경원으로 격하시킨 궁의 이름을 창경궁으로 회복시키고 궁내에 건립된 동물원과 놀이터 시설을 철거히고 문정전, 빈양문, 명정전 월랑 등을 중창하면서 남아있던 전각들을 보수 하고 또한 궁내 조경공사를 실시하여 조선궁궐의 옛모습을 되살렸다.
- 창경궁 안내 팜플렛중-
창경궁 (昌慶宮)
자연미와 왕실 생활이 조화를 이룬 궁궐
창경궁은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이 1483년(1484년 완공) 창덕궁 동쪽에 세운 궁궐이다. 창덕궁과 경계 없이 하나의 궁궐로 사용하여 둘을 합쳐 동궐(東闕)이라 칭하였다. 창경궁 터의 역사는 고려까지 거슬러 올라 간다. 세종이 즉위한 1418년 고려의 남경(南京) 이궁(離宮) 터에 상왕 태종을 위해 수강궁(壽康宮)을 세운 것이다. 성종은 창덕궁이 좁아 세명의 대비를 위한 공간으로 수강궁을 확장 보완하면서 공사 도중 창경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창경궁은 창건 초기에는 쓰임새가 그다지 많지 않았으나, 임진왜란 이후 창덕궁이 정궁 역할을 하면서 이궁(離宮)으로서의 활용 빈도가 높아졌다.
동양의 궁궐은 보통 정전을 남향으로 하여 남북 중심축을 따라 건물을 엄격하게 배치하는데 창경궁의 중심 부분은 특이하게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고려때 동향이었던 것을 존중했다고도 한다는데, 입지 여건상 동향으로 짓는 것이 지형에 더욱 자연스럽고 적합했기 때문인 듯 하다. 이처럼 창경궁은 자연 지형을 고려하면서도 기능과 용도에 따라 생활의 편의를 추구하여 조성했기 때문에 아름다움과 친근함을 두루 갖춘 궁궐이 되었다. 창경궁은 임진왜란때 서울의 다른 궁궐과 함게 불에 탔다가 1616년(광해8)에 재건 되었다. 이때 재건된 명정전은 현조하는 가장 오래된 정전 건물이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내전 건물들은 1830년 환경전 화재 이후 1834년(순조34년)에 재건한 것이다.
그러나 왕조의 상징이었던 궁궐은 일제의 훼손에 의해 왕궁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게 된다. 1907년부터 창경궁 안의 건물들을 대부분 헐어 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여 일반에 공개하였으면, 1911년에는 이름마저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시켰다. 또한 종묘와 연결된 부분에 도로를 개설하여 맥을 끊었다. 1983년 부터 동물원을 이전하고 본래의 궁궐 모습을 되살리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아직 많은 전각을 복원하지 못했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진 창경궁의 모습에서 왕실 생활의 체취를 느낄수 있다.
1 홍화문 일원 弘 化 門
궁궐의 품위를 보여주는 정문
창경궁의 중심 부분이 동향이기 때문에 정문이 홍화문도 동쪽에 세워졌다. 1484년(성종15)에 창건,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1616년(광해8)에 재건되었다. 2층누각형 목조건물로 좌우에 한쌍의 삽자각을 세워 품격높은 대문형식을 갖추었다.
홍화문을 통과하면 명당수인 금천이 흐르고 그 위에 500년도 더 된 옥쳔교(玉川橋 보물 제 386호)가 놓여있다. 다리 난간 아래 홍예(무지개 모양) 사이에는 궁궐에 들어 오는 나쁜 기운을 쫓기 위해 도깨비 상을 조각하였다. 창덕궁 돈화문이 5칸인데 비해 홍화문은 3칸의 작은 규모지만 아담하면서도 날렵하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홍화문은 보물 제 384호로 지정되어 있다.
<홍화문의 뒷모습 보물제384호>
<옥천교 보물제 386호>
임금과 백성이 만났던 홍화문
황화문은 임금이 친히 나가 백성들과 대면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영조는 1750년 균역법을 시행하기전에 홍화문에 나가 양반과 평민들을 직접 만나 균역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였다. 이때 대신들은 균역을 반대했지만 백성들이 찬성하자 영조는 백성들의 의견을 따랐다. 정조는 1795년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여 홍화문 밖에 나가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는데,<홍화문 사미도>라는 기록화에 그정경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창경궁으로 돌아온 소현세자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는 병자호란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9년만에 돌아왔다. 이때 백성들이 양철평(지금의 마포부근)에서 홍화문 앞까지 길을 가득 메우고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다. 청나라에 머무르는 동안 소현세자는 단순한 인질이 아니라 외교관의 역할을 해냈으며, 서양의 발전된 문물을 접하면서 장차 조선을 새롭게 변혁시키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었다. 그러나 귀국한 지 두달만에 갑자기 병이나, 병석에 누운지 3일만에 창경궁 환경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망 당시 소현세자는 새까맣게 변해 있었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고 한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청나라의 신임을 얻고 있던 세자를 독살했으리라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우리나라 근대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소현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다.
2 명정전 일원 明 政 殿
품격과 실용을 추구한 정전
명정전은 창경궁의 으뜸 전각으로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 등의 공식적 행사를 치렀던 정전(正殿)이다. 1484년(성종15)에 창건되어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가 1616년(광해8)에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니, 현존하는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이 중층 규모로 거대하게 지어진 것에 비해 명정전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다. 이는 애초에 창경궁이 정치를 위해 지은 궁궐이 아니라 왕대비 등의 생활공간으로 지은 궁궐이기 때문이다. 명정전은 단층의 단아한 규모지만 2단으로 쌓은 월대 위에 세워져 있어 정전의 위용을 갖추었다. 앞쪽에 펼쳐진 마당, 즉 조정(朝庭)에는 얇고 넓적한 박석(薄石)을 깔고 중앙에는 삼도(三道)를 두어 왕궁의 격식을 갖추었다. 명정문(보물 제385호)과 행각이 조정을 둘러싸고 있다. 행각들은 왕실 친위부대의 주둔지나 왕실의 초상을 치르기 위한 재실로도 쓰였다. 명정전은 국보 제 226호로 지정되어 있다.
<명정전 국보제226호>
명정전 행각에 주둔했던 장용영
즉위 전부터 항상 죽음의 위혀베 시달렸던 정조는 즉위 후 왕의 호위 부대를 키우는데 각별히 노력을 기울였다. 1784년(정조8)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세자로 바꾸고, 이를 축하하기 위한 경과의 무과시험을 실시해 무려 2000명을 합격시켰다. 이듬해에는 장용위라는 친위부대를 설치하여 이들을 모두 등용하였고 1788년 장용영으로 개칭하였다. 1793년에는 서울과 수원에 나누어 주둔하였으며, 서울에 주둔한 군대는 명정전 서쪽 행각에 자리했다.
3 문정전 일원 明 政 殿 국왕이 정무를 보던 곳 문정전은 왕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동향인 명정전과 달리 남향 건물이다. 정전인 명정전과 등을 돌리고 있는데 이런 특이한 배치구조는 다른 궁궐에서는 찾아 보기 어렵다. 편전이지만 왕실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으로 쓰인 경우도 있다. 영조의 첫째 왕비인 정성왕후와 철종의 비인 철인왕후의 혼전으로 사용한것이 그예이다. 문정전 일원은 일제강점기 때 헐렀다가 1986년에 문정문 동행각과 함께 복원 되었다. <동궐도>에는 숭문당, 명정전과 담장으로 구획디어 있고 2칸 규모의 작은 부속 건물이 있으며, 문정문에서 문정전 건물에 이르는 복도각이 길게 연결 되어 있는데 이부분은 아직 복원되지 못하였다.
<문정전>
<문정문>
사도세자의 비극 1762년 윤5월 13일 문정전 앞뜰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집권 세력이였던 노론은 어릴적부터 노론을 싫어했던 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하자 위기감을 느끼고 영조에게 온갖 모략을 고했다. 노론 세력이었던 세자의 처가와 누이 화완옹주 등이 이에 합세하였고, 생모 영빈 이씨가 이날 영조에게 유언비어를 고하여 결국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기에 이른다. 문정전 앞뜰에 놓인 커다란 뒤주에 갇혀 한여름 더위와 허기로 8일을 신음하던 세자는 28세의 짧은 생을 비참하게 마감했다. 영조는 세자의 죽음후 그를 애도한다는 의미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4 숭문당과 함인정 崇 文 堂, 涵 仁 亭 임금과 신하의 학문적 교류가 이루어진곳 숭문당은 임금이 신하들과 경연을 열어 정사와 학문을 논하던 곳이다. 창경궁 창건 당시에는 없었고 광해군 때 창경궁을 재건하면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1830년(순조30) 소실된 것이 그해 가을에 재건되었다. 경사진 터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뒤에는 낮은 주초석을 사용하고 앞에는 높은 주초석을 세워 누(樓)처럼 되었다. 영조의 친필 현판이 지금가지 남아 있다. 함인정은 원래 인양전(仁陽殿)이 있던 터에 1633년(인조11)건립된 정자이다. 남향에다 앞마당이 넓게 트여 있어 왕이 신하들을 만나고 경연을 하는 곳으로 이용하였다. 1830년에 소실되었다가 1833년에 재건되었다. 함인정은 건물 사방이 벽체없이 시원하게 개방된 모습인데<동궐도>에는 지금과 달리 3면이 막혀있다
<숭문당>
<함인정>
5 경춘전과 환경전 景 春 殿, 歡 慶 殿 왕실의 생로병사가 이루어진 곳 경춘전과 환경전은 통명전, 양화당과 함께 창경궁의 내전을 이루는 침전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왕과 왕비의 일상생활과 생로병사가 이루어 졌다. 경춘전은 성조이 1483년에 인수대비를 위해 지은 대비의 침전이다. 그러나 정조와 헌종이 이곳에서 탄생하고 많은 왕후들이 여기서 승하한 것으로 보아, 대비뿐 아니라 왕비와 세자빈도 많이 사용한 듯하다. 이에 비해 환경전은 왕이나 세자가 기거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본인의 탄생을 기념해 경춘전 내부에 '탄생전(誕生殿))'이라고 친히 쓴 현판을 걸기도 했다. 두건물 모두 창경궁 창건 당시 세워졌다가 임진왜란, 이괄의 난, 순조 연간 대화재 등으로 소실과 재건을 반복 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1834년(순조34)에 재건한 것이다.
<경춘전>
<환경전>
환경전에서 중종을 진료한 대장금 조선시대의 의녀들중 유일하게 왕의 주치의 역할을 했던 이가 대장금이다. 대장금은 1515년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출산을 맡았고, 1522년 자순대비의 병을 치료한 후 이공으로 중종의 치료를 전담하게 된다. 대신들은 의원이 아닌 일개 의녀를 주치의로 삼은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중종은 의원보다 대장금을 더욱 신뢰하여 마지막 까지 대장금에게 진료를 맡겼다. 중종은 오랫동안 앓아 오던 풍증과 그에 대한 합병증으로 1544년(중종39)에 환경전에서 승하하였다. <중종실록>에는 1524년부터 1544년까지 20년 동안 수차례에 걸쳐 대장금의 진료기록이 나온다
6 통명전과 양화당 通 明 殿, 養 和 堂 품위를 갖춘 내전의 중심전각 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위치한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의 으뜸 전각이다. 월대위에 기단을 형성하고 그위에 건물을 올렸으면,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에는 얇고 넓적한 박석을 깔았다. 서쪽 마당에는 동그란 샘과 네모난 연못이 있으면 그 주변에 정교한 돌난간을 두르고 작은 돌다리를 놓았다. 통명전은 주로 왕비의 침전으로 사용하였지만, 중종과 명종비의 빈전으로 사용된적도 있고, 경종은 편전으로 사용하였다. 양화당은 내전의 접대 공간으로 사용되었으나, 병자호란때 인조가 환도하면서 머무르기도 했다. 지금의 통명전과 양화당은 1834년에 재건한것이다. 통명전은 보물 제818호로 지정되어 있다. <통명전>
<양화당>
통명전과 장희빈의 저주 궁녀였던 장옥정은 숙종의 눈에 드어 후궁이 되었고, 왕자 균을 출산하여 희빈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숙종대는 조선왕조를 통틀어 당파간 정쟁이 가장 심했던 시기로, 왕은 자신의 여자들을 이용해 당쟁소에서 왕권강화를 꾀했다. 균을 세자로 책봉하는 과정에서 서인을 격침하고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시켰다가, 서인들이 민씨 복위를 꾀하는 과정에서는 남인들을 제거한다. 왕비까지 되었다가 다시 강등된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꼭두각시와 동물의 사체 등을 통명전 주위에 묻어 두었다. 이것이 발각되어 사약을 받으니 수많은 풍문과 일화를 남긴채 4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7 영춘헌과 집복헌 迎 春 軒, 集 福 軒 후궁의 처소가 밀집된 곳 양화당 동쪽에 자리한 영춘헌 일원에는 주로 후궁들이 거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남향인 영춘헌은 내전건물이며, 집복헌은 영춘헌의 서쪽방향에 5칸으로 연결된 서행각이다. 이 건물들의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1930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34년에 재건되었다. 이때 영춘헌은 창덕궁 중희당 부근에 있던 장남궁을 헐어 재건했다. 집복헌에서는 사도세자와 순조가 탄생했다. 정조는 순조를 낳은 수빈 박씨를 총애해 집복헌에 자주 출입하면서 가까운 영춘헌을 독서실겸 집무실로 이용하기도 했다. <영춘헌>
<집복헌외관>
영춘헌과 정조 독살설 영춘헌은 왕이 거처하던 곳이라고는 믿기지 않을정도로 소박한 모습이어서 정조의 검약한 성품을 느낄수 있다. 정조는 등에 난 종기가 원인이 되어 49세로 영춘헌에서 승하하였다. 처음에는 가벼운 종기로 진찰을 받았는데, 이날 의관 서용보를 교체하는 등 정조는 왕실 의관들을 믿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뛰어난 의학 실력을 갖춘 정조는 의원과 직접 의논하고 약방문을 지정해 주는 등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진찰을 시작한 지 불과 15일만에 죽음을 맞게 된다. 정조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정적 정순왕후의 거처인 '수정전'이었기에 정조의 독살설은 아직까지도 의문으로 남아 있다. 일각 “독살설 완전 해소 증거 아니다” ●“독살”→사망한 날 심환지 영의정에
정조 독살설은 조선시대 남인들이 제기한 적이 있으나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지금처럼 광범위하게 유포된 건 소설과 대중역사서에 힘입은 것이다.
독살설을 제기하는 측은 ‘정조실록’에 정조의 발병 기록이 사망 24일 전인 6월14일에 보이기 시작한다는 점을 들어 정조와 적대적이었다는 정순왕후와 심환지로 대표되는 노론 벽파에서 기득권 유지를 위해 독살을 감행하게 됐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조가 사망 1년 전인 179 9년 7월7일 외사촌 홍취영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벌써 건강에 커다란 이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정조는 사망 13일 전에야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에 “어제는 사람들이 모두 알아차렸기에 어쩔 수 없이 체모를 세우고자 탕제를 내어 오라는 탑교(榻敎·명령)를 내렸다.”고 썼다. 정조가 시종일관 자신의 병세를 극도의 비밀에 부쳤음을 알 수 있다.
●“낭설”→집권 시파서도 제기 안해
저서 ‘정조대왕의 꿈’에서 정조 독살설의 허구성을 분석했던 유봉학 한신대 사학과 교수는 “벽파가 정조를 독살했다는 주장은 집권 시파에서도 제기하지 않은 낭설에 불과하다.”면서 “소설적 상상력의 소산물이 사실(史實)의 영역을 침범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소설 ‘영원한 제국’으로 정도 독살설에 불을 붙였던 이인화 이화여대 교수도 “최대한 낙관적으로 해석해도 편지는 (독살에) 심환지가 연루되지는 않았을 가능성 정도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한걸음 나아가 “당시 간찰은 지금의 전화에 가까운 일상적인 통신수단으로 구어적인 표현이 있다고 해서 정조와 심환지가 가까운 사이였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고도 했다.
한편 비밀편지에 대한 관심이 지나치게 정조 독살설로 쏠리는 데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9일 기자회견에서 독살설에 대한 질문이 쏟아지자 “정조 어찰은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 일기에 기록되지 않은 당대 정국 동향을 다면적으로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라면서 “독살설이 어찰의 본질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8 내전 터 일원 內 殿 址 흔적만 남은 궁궐 여성들의 처소 이 일대의 숲은 궁궐 여성들의 처소가 모여 있던 생활구역이었다. 그 가운데 요화당과 취요헌은 효종이 공주들을 위해 지은 건물이었으며, 통화전은 혼전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사이 사이에 궁녀들의 작은 처소들이 많았고 어린 왕자들과 관련된 건물들도 섞여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이일대의 모든 내전들이 사라졌다. 태실과 성종대왕태실비 한국에서는 태어나자마자 한살이 된다. 뱃속의 태아도 온전한 존재로 보아 나이를 계산하기 때문이다. 궁궐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3~7일 사이에 길한 날을 잡아 태와 태반을 깨끗이 씻고 술로 갈무리해 태항아리에 넣었다. 여러 단계를 거쳐 밀봉된 태항아리는 수개월 내에 태실을 선정해 봉인했다. 성종태실이 창경궁에 있는 이유는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이왕가박물관의 진열품으로 사용하기 위해 옮겨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 정조가 1793년 홍참판댁에 보낸 유려한 필치의 한글 편지.
반면 ‘조선왕 독살사건’의 지은이인 이덕일씨는 “이번 편지에서 병에 걸린 정조가 사후 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면서 정조가 사망한 바로 그날 정순왕후 김씨가 인사를 바로 단행해 심환지를 영의정에 임명한 점을 들어 여전히 독살설에 무게를 실었다.
▲ 정조가 1797년 4월11일 심환지에게 한문으로 써서 보낸 비밀편지(왼쪽)에는 ‘뒤쥭박쥭(뒤죽박죽·빨간 점선 표시)’이라는 한글 표현이 보인다.